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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육사인상-2007김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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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 박병호 김재명
김재명 동문 공적
 
1. 서문
  金在明 將軍은 사관생도로서 1950. 06. 25 북괴남침과 더불어 참전한 것을 큰 보람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의 애국심과 소명의식, 사명감에 투철한 將軍像은 동료뿐 아니라 부하들로부터도 존경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6·25격전 시 큰 전투에서 탁월한 지휘력으로 여러 전투에 크게 기여했으며. 전후의 공비 토벌과 越南 참전 등 수많은 전장을 누벼왔습니다.
 
우리 군에서 한미 연합 작전 면에서의 권위자로서도 널리 알려져 있으며, 남다른 경력의 소유자로서 1970년대에는 UN군사령부의 5027 방어계획을 최초로 한미 공동으로 작성하는데 참여, 수도 서울 고수방어 및 단기 결전 등을 주장하여 한국군의 의지를 반영시켰고, 1976년 8·18 북괴 도끼 만행사건이 발생하자 UN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와 한국군 대표로 임명되어 그 끈질긴 공세적 압력 협상으로 끝내는 金日成으로부터 유감 표명을 받아내는데 주력, 그 공적으로 R.O.M훈장을 UN군사령관으로부터 받은 바 있습니다.
또 우리 군의 선진화?과학화의 선구자로써 70년대 초에 벌써 군의 OR·SA 분야 및 Computer War Game 기법을 도입하여 한국화 모델 개발에 힘썼고, UN군사령관이 朴正熙 大統領께 C/E(費用對?果) 技法을 한국군 현대화 평가에 적용하겠다고 건의한 바도 있습니다. 그리고 陸本 作戰 參謀 副長 재임 시에는 국가적 위기를 맞이하여 한?미간 원활한 협조 관계를 유지하는데 노력했고, 우국충정이 담겨있는 "尙武忠正作戰指針"을 작성 하달하여 군의 자세, 즉 "民族史的 意義를 지닌 작전이며, 국민의 보루인 국군의 사명을 다하는 聖戰이 되어야 한다"를 천명하였습니다.

1980년대 서울 올림픽 대회를 위하여 서울 대 지하철망(105Km)의 건설 책임자로 부임해서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성공적으로 외자를 도입하여 국익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또한 우리 건설계의 기술 수준으로는 어려워 주저하던 최신 NATM 터널공법을 과감히 도입, 정착시켜 공기 단축과 공사비 절감 뿐 아니라 품질 관리, 안정성, 시공성을 크게 높여 국내 기술 수준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외자 도입 계약 시에는 한글 계약서 우선 원칙을 강행하여 그 선례를 남기고 調達廳 정책에 반영시킨 바도 있습니다. 오늘날 서울 지하철은 세계 정상(529Km)의 문화 지하철로 세계의 자랑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실로 우리 모두가 자랑할 만한 빛나는 업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2. 1950. 06. 25 북괴 남침 시 처음부터 참전
 

1950. 06. 25 육사 생도로서 졸업 행군을 앞두고 서울 외출 중 방송에 "3?8선에서 북괴군이 전 전선에서 기습 남침중" 이라는 긴급 뉴스가 나왔다. 그 길로 다시 학교(육사)로 달려갔더니 연병장에는 징발된 민간 트럭이 대기하고 있어, 바로 抱川 지구 내촌으로 출동해 전투에 투입되었다. 27~28일에는 육사 갈매리역 전투, 광나루 전투, 판교 전투, 수원지구 전투까지 참전하였다. 초전 전사자만 150명(1期 65명, 2期 85명)으로서 출동 437명의 34%에 달하는 격전이었다. 근래 일부 左傾人事들이 "6?25가 北侵이다"라고 허위 선전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이는 국민을 기만하는 처사로서, 아직도 이 땅에는 당시의 참전 용사들이 적잖게 살아 있어 산 증인이 되고 있다.

漢江 이남 전투에서는 육사 생도 대전차 특공 결사대에 7명의 동기생과 함께 자원 출동하였다.
당시는 적 전차가 가장 가공할만한 무기로서 거기에 대항할만한 무기가 없는 우리의 前線은 맥없이 무너져가고 있었다. 전차 한 대만 격파하면 전세가 역전되고 적의 진격을 저지시킬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최후 수단으로 육사생의 대전차 특공대(自願者)를 모집하던 중이었다.
安養 戰線이 위급해지자 이에 자원, 3/4톤 트럭에 수류탄을 싣고 이를 10발씩 몸에 감은 채, 적 전차 밑부분을 폭파하고자 水原을 출발, 안양 "지지대고개"를 달리고 있는데 후방에서 전속으로 지프차가 달려와 "정지, 정지!" 하면서 급히 긴급 명령을 전달하였다. "陸士生의 대전차 특공결사대, 공격 중지하고 복귀하라. 미군이 참전 상륙 중...."
지금 생각하면 무모한 작전이었지만, 어쨌든 군인으로서 6?25 초전 참전은 내게 있어 큰 보람이기도 하다.

3. 동해안 351 高地 焦土 全滅 作戰
 

1952~1953년의 전투 양상은 서부의 白馬高地戰鬪 중부의 首都高地激戰, 동해안의 351高地激戰으로 이들 전투는 작전상의 요부 요지를 중심으로 연대, 사단급의 대격전이 날마다 주인을 바꿔가며 계속되고 있었다.

처음 351고지 전투의 시작은 1952. 07. 11 밤 적의 대공세로 이 고지가 점령됨으로써 개시되었다. 제5사단 35연대에서는 즉각 역습을 감행키로 하고 7월 12일까지 5회나 되풀이 공격했으나 병력 손실만 초래하고 실패하자, 사단에서는 예비 연대인 27연대를 다시 투입해 8차에 걸친 역습을 시도했으나 이 역시 실패하고 연대장, 사단장(張준장)의 해임으로까지 어어졌다. 계속되는 전투로 병력 손실도 커 사단 내에는 2개 중대의 가용 병력의 전부였다.

7. 13일 군단장 李亨根 중장은 대노하여 군단 고문단장, 부사단장, 35연대장을 대동하고 35연대 2대대 OP에 나타났다. 그는 상황 보고를 받은 후 "잔여 2개 중대 병력 만으로라도 즉시 반격하여 점령하라!"고 엄명했다. 연대 병력으로도 실패한 목표를 2개 중대 병력으로 점령하라니..... 모두 이 엄청난 사태를 맞이하여 침묵할 뿐 한마디 말도 없었다.
이때 대대 작전 장교 김재명 대위가 군단장 앞으로 나아가 주저없이 입을 열었다.
"각하, 건의 드리겠습니다. 주간 공격은 더 이상 안됩니다. 병력은 2개 중대 뿐, 그러므로 야간 공격을 감행하겠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성공시키겠습니다."
이 당돌한 대위의 말에 깜짝 놀란 군단장이 "귀관은 누구야?" 하고 물어"예. 35연대 2대대 작전 장교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나이 어린 작전 장교의 진언에 적잖게 놀란 표정이었다.
"저희들이 실패했을 땐 처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병력이 없으니 焦土作戰을 하겠습니다. ①항공기, 네이팜탄 3쏘티 ②미해군 함포사격 30분 ③사단 전 포병을 대대에 배속시켜 주십시요!"
큰 결정은 내려졌다. "알았어!"

군단장이 하산하자, 어둡기 전에 공군의 네이팜탄이 351高地 및 그 주변 골짜기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미 해군의 함포 위력도 대단했다. 거포가 터질 때마다 고지가 조각조각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이 광경에 사병들의 사기도 치솟았다.
사단 포병에게는 대대별로 고지 1개씩을 맡겼다. 적의 진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적의 기관총을 1분 이내로 제압하지 못했을 시, 적의 포사격을 제압하지 못했을 시는 책임제로 처벌한다고 했다. 사단 포병 사령관이 대대 OP에서 직접 포사격을 지휘했다. 적도 결사대를 계속 투입했지만 사람인이상 초토화되고 불바다가 된 그 곳을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었으리라. 351고지가 350고지가 될 정도였으니까.

대대 야간 공격 개시는 13일 20시 30분, 2개 중대가 병렬로 LD를 넘었다. 포병은 정밀 포격을 가했고 적의 측방 사격은 즉시즉시 제압하면서 전진하였다. 적의 포사격도 주간보다 덜하여 24시에 9부 능선을 넘어 교통호에서 저항하는 적병을 처치했고, 적들도 지칠대로 지쳐 있어 큰 피해 없이 고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기에 적은 아군의 야간 공격에 기습을 당한 것이다. 대성공이었다. 곧 大焦土爆擊, 大艦砲射擊, 그리고 우리 포병의 정밀 포격과 야간 기습이 적의 허를 찌른 작전이었다고나 할까...
이 戰例는 그 후 육군 대학에서 교재로 사용되었다.

그 후 적은 여러 차례 351고지를 공격해 왔으나 그 때마다 아군의 역습에 물러나곤 했다. 우리 측의 351고지 사수의 집념을 알고, 또 처음 전투에 그들은 너무나 큰 피해를 입었기에 휴전 시까지 점령을 단념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오늘날 동해안 휴전선이 다른 곳에 비해 38°30′까지 북으로 올라간 것은 그 때의 그 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4. 육군 작전참모부장으로서 광주 진압작전 집행
 
가. 작전명령의 작성 (그 의의와 충의정신)
 
전장에서의 전투작전이 아니고 국내에서 대란을 진압하는 데는 제한사항으로서
시민의 안전을 첫째로 해야 했고, 군의 사명과 이념을 표명하고 구국정신을 강조해야 했다.
본 작전은 민족사적 의의를 지닌 작전이며
국민의 보루인 국군의 사명을 다하는 성전이 되어야 함
작전명령을 내릴 때까지는 먼저 동서양의 전훈(戰訓)을 살폈고, 다음 두 전훈을 기초삼아 작성하였다.
① 미국 남북전쟁 시 "링컨 대통령의 게티즈버그 연설문(1863.11.19)"
- 만인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명제
- 이 나라의 존폐를 걸고 내전에 휩싸였다.
-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② 諸葛孔明의 "轉出師表"
- 동양 최고의 충의의 출사표이다.
- 先帝創業未半, 而中道崩? ......
  此誠危急存亡之秋也.
나. 명령의 결재와 보고 (1980. 05. 25)
 
육군 참모총장 / 계엄사령관 대장 이희성의 결재 후에 국방장관 주영복, 합동참모회의 의장 유병현 대장, 해군 참모총장 김종곤 대장, 공군 참모총장 윤자중 대장이 함께 모여 있는 국방부장관 공관으로 육군 참모총장과 함께 가서 작전참모부장 김재명 소장이 공식으로 육본 작전명령인 "상무충정작전 지시"를 보고하였으며, 승인을 받은 뒤에 작전참모부장이 확인 서명을 했다.
다. 崔圭夏 대통령 보고
 
당시 최 대통령께의 보고는 육군 참모총장이 정서한 명령서를 가지고 가서 직접 면담하고 보고하였다.
라. 최규하 대통령의 광주 현지 시찰
 
최대통령께서는 1980.05.25 17시에 폭우 중에도 불구하고 주영복 국방장관, 이희성 육군 참모총장, 김종환 내무장관을 대동하시고 CAC사령부(전투병과 교육사령부)를 방문하셨다. 광주 현지에는 CAC사령관 소장 소준렬, 도지사 장형태, 광주시장 구용상, 경찰국장 박용학, 중정 지부장 박정인과 육본 작전참모부장 등이 배석하였다. 회의실에서 먼저 소준렬 사령관으로부터 현재 상황과 CAC사령부의 작전계획을 보고 받으시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셨다.
마. 최규하 대통령 하문
 
최대통령 하문 :
"그 작전을 행한다면 희생자가 얼마나 발생할 것 같소? 도지사의 생각은 어떻지요?"
도지사 :
"예. 각하. 죄송합니다. 제가 미흡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는 대답이 없었다. 모두들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마지못해 브리핑을 하고 있던 김순현 작전참모(준장)가 입을 열었다.
"상황은 예측하기 어려우나 약 150명 정도의 희생은 각오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 등에서 얻은 시가지전투의 경험 수치였다. 최선의 판단 수치로 생각되었다.
대통령은 시내에 들어가겠다고 하셨으나 지금의 사태 아래 지상 이동은 불가하다는 간곡한 진언에 따라 그 대신 방송을 위한 녹음을 현지에서 하시고 그대로 상경하셨다.

*이상은 현재까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는 진실이다. 000가 정권을 탈취하기 위하여 광주사태를 일으켰다 함은 거짓이며, 군이 박대통령 시해사건 후의 혼란과 격동의 와중에서 쿠테타를 일으켰다는 잘못된 인식은 군의 명예 회복을 위해서도 하루 빨리 시정되어야 한다. 아마도 작전 중지 지시가 있었다면 작전은 바로 중지되었을 것이다. 사태 발생에서 조처, 판단, 계획, 명령, 결재, 하달, 최대통령의 현지 방문 등 전 과정에서 결코 정도를 벗어난 군사조처는 없었다고 증언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 외국의 군사 전문가들도 이스라엘의 엔태베 작전 이상으로 이 작전을 "One of the finest military art" 라며 높이 평가하고 있다. 즉, 엔태베 작전이 중대급 작전인데 비해 이 작전은 사단급 작전인데다가 그도 야간에 이루어진 기습작전이었기 때문이다.

 

5. 한미 연합 합동작전 임무 완수
 
가. 김재명 장군의 특출한 경력
 
김장군은 우리 군에서 독특한 존재이었습니다. 특히 한?미간의 연합 합동작전 분야에 남긴 업적은 큽니다. 곧 1969년부터 주한 UN군사령부에 창설된 한미 연합 참모 기획단의 작전참모 및 단장으로서 UN군사령관에게 한국군의 의사를 전달하고 이해시키는데 공헌했으며, 최초로 UNC작전계획 5027을 한미 공동으로 작성하는 선례를 만들었고, 또 한국 측이 열망하는 수도 서울 고수(한국식-사수)와 단기 결전 개념을 반영한 업적을 이룩하였습니다.
나. UN군사령부 브리핑 시 한미 기획단장(김장군)의 좌석 배치
 
UN군사령부 공식 브리핑 시는 한국군 장성이 비록 준장이라도 반드시 UN군사령관의 좌측(서열 3위격)에 자리하고, 우측은 UN군부사령관(중장), 참모장 순으로, 그리고 그 좌측은 김장군 다음에 미 고문단장(소장), 해군사령관(소장) 순으로 하도록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킴으로써 UN군사령부 참모부서와 한국군 간의 업무 처리가 과거와는 달라지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UN군사령부의 Focus/Lens 훈련 시는 UNC의 평가단장을 김장군이 맡고 부단장은 미국군 준장이 맡아서 평가단을 지휘, 운영하도록 하였습니다.
다. UN군사령부 군사정전 위원회의 한국 대표로서 1976
 
8.18 북괴의 도끼 만행 사건에 적극 참여하여 UN군사령부 군사 정전위 수석대표(싱그럽 장군), UN군사령관(스티웰 장군), 미대사(슈나이더 대사)와 합석, 연일 북괴의 만행에 대하여 초강경 군사 압력책을 강구하도록 조언함으로써 마침내 김일성의 사과문(유감 표명)을 군사 정전위 사상 최초로 받아냈습니다. 또한 판문점 본부지역 및 정전 태세 안정에 크게 기여함으로써 UN군사령관으로부터 The Legion Of Merit 훈장을 수여받기도 하였습니다.
라. 한미 야전군사령부 부사령관
 
한미 야전군사령부 부사령관 재임 시는 군사 외교를 통하여 한미 군부대 간의 "血盟의 友誼"(박대통령의 휘호) 여건 조성에 헌신하였습니다.
또 한국군 참모장교의 어학 능력, 참모업무 능력 향상과 한국군의 지위 향상에 주력하여 영어로 일상 브리핑이 가능하도록 하였으며, 미국군 참모들에게는 간단한 우리말 브리핑을 할 수 있도록 교육하였습니다.

한미군 장교의 출장 근무 시의 불평등 차별 대우를 없애고 숙소 배정, 교통수단 이용, 또 출장비 지급 등에 차별이 발견될 때는 출장 취소 명령으로 복귀 조처까지 한 바 있습니다. 미군 행정의 기본인 "規定과 節次"를 전부 "한미 연합 규정과 절차"로 개정 작성하여 한국 측의 위상을 높임과 동시에 불이익이 없도록 주력하였습니다. 이는 후일 한미 연합사령부 창설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년간 외국군 참모부에서 근무하여 터득한 경험과 유창한 어학 능력으로 미군 장교들을 격려 지도하여 부사령관의 지시가 사령관 지시 못지않게 받아들여지는 전통도 세웠습니다.

의정부에 위치한 군사령부 내에 사령관(미군) 숙소와 부사령관(한국군) 숙소를 한국 측에서 새로 지어 한미 장교들이 일과 후엔 서로 친선 교류를 할 수 있도록 하고 미군 사령부 정문 관리를 한국군 헌병 장교(대위)로 교채 임명하여 한?미군과 민간인 출입자의 편의를 도모하고 동시에 군기를 쇄신하는 데도 헌신하였습니다.

장기 근무 하사관들의 셋집살림의 슬픔을 완전 해결, 시내에 내 집을 갖게 했습니다. 곧 의정부 시청 측과 협의하여 정부와 시 새마을 사업비(최저리?장기)를 대출 받아 34가구를 짓는데 지원 받고, 토지는 군에서 쓰지 않는 땅을 지원해서 그들의 소원을 이루게 했으며, 하사관들도 미군 병사들을 초청, 대접할 수 있게 되어 군 근무에 보람과 긍지를 갖게 했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의정부 시청 근처에 자리한 좋은 집에 살고들 있습니다.

 

6. 한국 국방경영 분석학회
 

(Military Operation Reserch Society Of Korea : MORS-K) 설립
조국 현대화 및 군 현대화에의 열정이 들끓었던 1970년 대 초, 군의 정책 개발, 전략 전술의 선진화에 선도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군 OR학회"를 설립하여 "과학적 의사 결정 학문"의 정착화, OR/SA, Computer War Game, Simulation의 기법 도입과 한국화에 앞장섰고, 1973. 01. 15 당시 유재흥 장관의 학회 설치 재가를 받아냈고, 1980~1987에는 본 학회의 제3대 회장을 역임했으며, KAIST와 협력하여 개발한 "무기 체계?비용대 효과 분석 : C/E 분석 모델"은 당시 UN군사령관이 박정희 대통령께 한국군의 전력 증강 사업 추진에 참작하실 것을 건의할 정도의 평가를 받았으며 국방 대학원에 OR 석사과정(1982)설립을 비롯, 전국적으로 분회 및 후원회까지 발족하여 현금 IT시대를 개척해 나가는 데 군이 선도적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현재는 본 학회의 명예 고문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7. 서울 大 地下鐵網의 建設 - 世界 第一位
 

성 명 : 金 在 明
소 속 : 전 서울지하철공사 사장

김재명 장군은 1981년부터 1988년까지 서울지하철공사의 초대 사장을 역임하면서 서울지하철 3, 4호선(59km)의 건설 사업을 진두지휘하여 예정대로 완성함으로써 '86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에 대비하고 서울의 대중교통 체계 개선과 지하철의 건설 기술 혁신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지하철 3, 4호선은 서울의 도심지를 통과하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가 지난(至難)했을 뿐만 아니라 잇달아 재기되는 민원 또한 1500채 건물 철거 문제 등 해결이 용이하지 않았고 건설 과정의 각종 사고 처리 등, 표현 그대로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사장은 불굴의 투지와 역사의 죄인이 되지 않는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5년 8개월의 고투 끝에 단군 개국 이래 최대 공사라고 했던 역사적 건설 사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였습니다.
서울지하철 3, 4호선 건설이 대중교통난 해소에 크게 기여한 것은 일반 대중에게도 이미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지하철 건설과 관련된 여러 분야의 국내 기술이 3, 4호선의 건설을 계기로 획기적으로 향상된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김사장은 평소에 대형 프로젝트 수행 중에 선진국에서 도입하는 기술을 충분히 소화하고 향상시켜야 나라가 발전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준공기한에 쫓기면서 시급하게 추진되는 실제의 프로젝트 환경 속에서 소신대로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만 김사장의 선견지명과 확고한 철학, 그리고 투철한 사명감은 지하철 분야의 여러 기술 수준을 현저하게 재고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지하철 건설에 새로운 터널 건설공법인 NATM을 도입하여 우리나라의 터널기술이 선진 수준에 도달하게 된 것은 기술사에 길이 남을 김재명 사장의 업적입니다. 지하철 3, 4호선은 교통이 매우 혼잡한 도심지역을 통과하고 노선 곳곳에 각종 지하 설비가 매설되어 있으며 청계천을 비롯한 도심하천, 지하상가, 고층건물 하부 구조 등 장애물이 많아서 공사 중 노면 교통에 미치는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안전성과 경제성을 함께 확보할 수 있는 터널공법이 필요했습니다. 마침 유럽과 일본에서 활용되고 있던 새로운 공법인 NATM 터널공법이 서울의 실정에 적합한 것으로 소개되었는데 공법의 우수성에도 불구하고 고도의 설계 능력과 현장 측정기술, 철저한 품질 관리를 요하기 때문에 기술 도입에 부정적인 견해가 적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설계 기술 수준이나 현장 측정, 품질 관리 능력, 그리고 정해진 공사 기간 등을 감안할 때 신공법을 도입해서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김사장도 선뜻 결심하기가 어려워서 국내외의 관계자들과 많은 의견을 교환하였습니다. 깊은 고뇌 끝에 김사장은 NATM을 도입하기로 결정하고 이 기술이 지하철 3, 4호선 건설을 넘어 장래의 터널 기술 발전에도 유용하도록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 결과 3, 4호선의 토목 공사가 성공적으로 완료되었고 그 이후 정부 고속 전철을 위시한 철도와 도로의 터널 공사에 NATM 공법이 광범위하게 활용되는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NATM으로 인한 경제적 효과도 막대하여 김사장이 나라 경제에도 크게 공헌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빠듯한 공기에도 불구하고 지하철 3, 4호선을 기간 내에 완공할 수 있었던 요인 중의 하나는 사업종합관리제도(PMMRS)의 도입, 운영이었습니다. 이 분야에 해박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김사장은 종합 공정 상황실을 설치하고 지하철 사업을 효율적으로 관리하여 3, 4호선이 당초 계획한 대로 3단계의 부분 개통을 거쳐 완성되는 것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복합 공정 건설사업의 프로젝트 관리 기술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건축 분야에서도 역사 설계가 개선되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각 역사가 가급적 고유의 특성을 지닌 지하 문화공간이 되도록 설계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종래의 단조로운 색상을 탈피하고 생동감 있는 색상을 도입할 디자인을 강조하였습니다. 기능적인 목적을 달성하는데 그치지 않고 예술성을 분출하는 역사, 특히 사라져가는 전통적 특징을 보존하는 역사가 되도록 창의적인 설계를 하도록 득려하였습니다. 그 이후 이러한 지하공간의 창조적 개념이 후속 지하철노선 뿐 아니라 기타 다양한 지하 구조물에 적용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전기, 신호, 통신 등 지하철 시스템 분야에서는 차량 운행에 5중의 안정장치가 확보되도록 하여 승객의 안전을 최대한 도모하였습니다. 차량형식도 외판을 개선하기 위하여 곡선형을 가미한 유동형으로 결정하였으며 250회 이상의 각종 시험과정을 거쳐 색상 및 도장 방법을 선정하였습니다. 김사장은 당시의 사회 환경에 걸맞지 않는다는 시각에도 불구하고 역무원의 처리능력 한계를 넘는 과중한 업무량(역당 20만명/日)등을 고려하여 역무를 자동화(AFC)해야 한다고 믿고 이를 과감히 추진하였습니다. 20여년이 지난 오늘날 돌이켜 보면서 김사장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김사장은 여러 분야의 기술 혁신과 발전을 위해서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계약관리 면에서도 몇 가지 획기적인 조치를 취하여 분쟁의 소지가 없도록 했습니다. 외자차관 계약에는 국제 변호사를 참여시켜 외국과의 법적 시비를 사전에 차단하였고 계약서는 영문과 한글로 작성하되 한글 계약 우선 원칙, 적용법은 대한민국법, 재판관할권은 대한상사 중재원으로 하는 기본 원칙을 세우고 이를 관철하였습니다. 이러한 기준은 조달청 표준계약서에 반영하게 되었고 국익을 신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서울지하철 3, 4호선 건설의 경험과 그 당시 도입된 각종 기술은 한강을 통과하는 하저 터널을 포함하여 서울지하철 5~9호선을 건설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하여 현재 세계 1위(529km)의 지하철과 광역철도 네트워크를 갖춘 서울의 모습이 가능하도록 하였습니다. 자랑스러운 업적을 탄생시킨 김재명 사장의 탁월한 리더십과 관리능력, 그리고 애국적인 사명감을 길이 기리고 싶습니다.


◆ 주요경력
 
  # 경력
  1950. 06. 25 전쟁 발발과 더불어 참전
  1952. 07. 11~14 동해안 351고지 탈환전
  1965 ~ 1968 맹호?비둘기 주월사 참전
  1970 ~ 1979 한미 연합 기획 참모단장
  1975 ~ 1977 UN 군사정전위원회 한국 대표
  1977. 02. 01 보병 제 31 사단장
  1979. 09. 17 한미 야전군 사령부 부사령관
  1980. 06. 10 국방부 군특명 검열단장
  1981. 09. 01 서울 지하철공사 사장 (1~3대)
  1972. 10 한국 군사 운영 분석학회 간사장?회장
  1986. 06 대한 상사 중재원 중재위원

  # 학력
  1950. 07. 10 육사생도 1기
  1952. 04. 07 미 보병학교 OBC 1차
  1956. 06. 13 미 보병학교 OAC 7차
  1965. 08. 31 육군대학
  1962. 02. 20 미 EAST LA대학 (경제학)
  1963. 03. 24 미 UCLA대학 (경제학)

  # 상훈
군 훈장 (무공) 7조 ·(공로) 5조
동탑산업 훈장 1조
  미합중국 리죤 오브 매리트 훈장 1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