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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육사인상-2007박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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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 박병호 김재명
박병호 동문 공적
 
1. 6.25 사변당시의 전공(국가유공자로써)
 
洪川 동북방지구 전투에서
朴炳浩 소위(당시 계급)는 육사를 졸업한 후 강원도 홍천 동북방에 위치하고 있는 제6사단 제2연대 제1대대 1중대 2소대장으로 부임한 것은 1950년 1월이었다.
당시 제2연대장이었던 함병선(咸炳善)대령은 평시부터 만일 적이 침공해 온다면 박병호 소대가 담당하고 있던 지역으로 제일 먼저 침입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그 대비책의 하나로 다른 소대에 비해 병력과 장비를 증강시켜준 상태였다.
2. 농지개간(歸農(귀농)에 성공한 者로써)
 

朴炳浩는 1965년 10월 01일, 중령으로 전역하였으며 전역당시 일시금으로 38만원을 지급 받았다. 朴炳浩는 군대이외의 사회경험이 전연 없는 데다 負傷者로써 步行에 불편을 느끼고 있는 터이어서, 가급적이면 육체적 활동이 적은 직장을 구해보려고 노력하였으나 그 당시로서는 적성에 알맞은 직장을 구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에서 별 따기나 마찬가지였기에 직장 구하기에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 차라리 시골 농촌에 내려가 농사나 지으며 지역사회개발과 발전을 위해 남은 여생을 바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京畿道 利川에서 농장을 영위하고 있는 육사동기생 尹國
燮 君을 우연이 만나 자기의 처지와 앞으로의 진로 등을 말했더니 마침 적당한 토지가 있기는 한데 워낙 山間僻地나 다름없는 곳이라 처음부터 개간(開墾)을 하면서 정착해야 할 곳인데 朴炳浩의 신체적 조건을 감안할 때 무리한 일이 아니겠느냐는 물음에 당시의 재정적 혹은 가족적 사정으로 보아 이것저것 가려가며 구미에 알맞은 곳을 구할 형편이 아니였다.
그래서 朴炳浩는 동기생인 尹國燮 君이 권하는 현 주소지에 정착하기로 결심하고 전역당시 일시금으로 받았던 38만원 전액을 드려 荒蕪地(황무지) 1만2천 坪(평)을 마련하였다.
1965년 당시의 京畿道 利川郡 부발 이란 곳은 그 지역 주민 외에는 아는 사람도 없고, 온전한 도로, 교통수단도 갖추어져 있지 못한 山間僻地인데다 잡목과 잡초가 무성한 荒蕪地었지만, 그곳에 우선 움막을 짓고 가족들을 수용하고 개간과 동시에 식량거리가 될만한 채소재배부터 시작해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지체 없이 문자그대로 赤手空拳(적수공권)으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 낫선이 處女地(처녀지)에 첫 삽을 발벗다.
그는 그로부터 5년간 불편한 몸으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가족들의 따뜻한 격려가 있었을 뿐 고독과 고난과 빈곤 등 피눈물나는 혹독한 시련과 겪으면서도 혼신의 노력을 경주함으로써 드디어 그 땅을 개간하고 정착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의 성공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 성공이 있을 때까지 육체적 노력과 농사에 대한 지식이 요구되었다. 그래서 그는 일몰 시까지는 개간에 힘을 쏟았고 밤에는 농사공부를 해야하는 문자 그대로 晝耕夜讀(주경야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또 처음 해보는 농사일에 익숙하지 못하여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도 발생하였고 가족들의 식생활 문제도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窮乏(궁핍)해져 생계에 위협을 받기도 하였으며, 체력에도 한계가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전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난감한 처지에 빠질 때마다 내가 어리석었지, 왜 이런 고생을 해야하는가? 하고 후회도 해 보았고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도시에 나가 다른 일거리를 찾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여 처음 마음먹었던 결심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陸士人으로써 軍생활을 통하여 터득한 책임감과 사명감을 상기하며 역경에 굴하지 않고 初志一貫(초지일관) 그의 능력과 체력의 한계를 초월한다해도 당해낼 수 있는 忍耐(인내)와 無에서 宥를 創造(창조)해 보겠다는 굳은 意志, 그리고 내가 반듯이 일구어 내고야 말겠다는 開拓精神과, 不屈(불굴)의 精神과 決斷力으로 不斷(부단)한 노력 끝에 얻은 값진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당초에는 주변에 거주하는 지역 주민들은 물론 친지들까지도 "정신이상자가 아닌 바에야 왜 저런 고생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몸도 불편한 사람이 한다면 얼마나 하겠나?"하고 비웃음을 당하기도 하였다. 보다 못한 어떤 친구들은 그가 너무 안쓰러워 援護對象者(원호대상자)로서 지원을 받도록 해보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는 "나보다도 더 어려운 환경 속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그런 혜택을 받겠다고 나설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람들부터 먼저 원호해 주어야지"하고 다시는 그런 말을 할 수 없도록 단호히 거절했다.
그리고 땅은 노력과 정성을 드린 것만큼, 수확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누가 무슨 말을 해도 개의치 않고 자기일에만 전념하였다.
1960년대 우리나라의 사정이 농기구가 지금과 같이 발달되지 못한 때이기도 하였지만 설사 좋은 농기구가 있다해도 그에게는 농기구를 구입할 만한 經濟力이 없었다. 그렇다고 人力(인력)을 사서 농사를 지어 보겠다는 생각은 더더욱 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그는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성실함과 정직함을 일치 안고 온 가족이 혼연일체가 되어 묵묵히 사력을 다하여 황무지를 일궈내고 그 땅에 뿌린 씨앗으로 나온 새싹들을 정성껏 가꾸어 남들보다 더 많은 수확을 올리는데 큰 보람을 느끼곤 했다.
처음 그가 정착할 때만 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연 관심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던 주변주민들 사이에 소문이 나기 시작하였고 한사람 두 사람식 알려지게 되었다.
소문에 듣자하니 고급장교출신의 상이군인이란사람이 이런 벽지에 와서 무슨 일을 하겠는가, 그러다가 기력이 떨어지면 가버리겠지 하고들 있었는데 수년이 지나도 무엇을 하고 있는지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아, 그가 도대체 무엇을 하고있는지 알아볼 겸, 찾아와 보고는, 그처럼 쓸모 없어 버려졌던 땅이 좁을세라 모두 옥토로 바꾸어 놓았고, 경작지가 부적합한곳에는 有實樹를 심는 등 농장으로써 손색이 없을 정도로 가꾸어 놓은 현장을 눈으로 확인하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부터 주민들은 그의 피나는 노력 끝에 얻은 성과를 높이 평가하고 존경함과 동시에 그의 성실성, 근면성과 열의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 거주하는 사람가운데에는 자기네 토지가 朴炳浩가 일구어 놓은 농장과 인접해 있는 곳이 있으니 그 땅도 같이 재간해서 쓰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토지대장까지 들고 와 사양을 하는데도 무릎 쓰고 강제로 맡기고 가는 사람까지 생겨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소문이 순식간에 경기도 전역에 퍼지게 되었고, 급기야는 1973년 8월 8일자 중앙일보에 "傷痍勇士(상이용사)가 황무지를 개간, 귀농에 성공" 하였다는 기사가 보도되어 전국방방곡곡에 알려졌고 歸農을 희망하는 상이군인, 전역장병, 그리고 일반인들까지, 交通도 불편한 그의 농장을 찾는 사람이 줄을 이었고, 각 보도기관은 이 사실을 경쟁이라도 하듯 기사화 하여 전국에 보도되었다.
어느 사이 그는 傷痍勇士로서 歸農(귀농)하는데 성공한 모범농군으로 전국에 알려진 인물이 되어 있었다.
박병호 자신은 "그저 살기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다했을 뿐인데" 하는 겸손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가 처음,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지면서 그 지역의 발전을 위해 봉사해야겠다"는 순수한 생각으로 이곳에 정착은 하였지만, 막상 현지에 내려와 수년간 농터(경작지) 마련을 위한 개간에 온 힘을 경주하다보니 처음 마음먹었던 것이 순조롭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수년간 우선적으로 가족들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 한 다음 지역사회발전을 위해 헌신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이제 겨우 그 기회가 도래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의 성실성과 근면성이 농터 확장에도 나타나 그의 농장이 어느 사이 3만 여평으로 확장되었다.

3.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공헌(사회봉사자로써)
 

박병호는 우선 가족들의 식생활걱정을 다소나마 덜게되자 그가 꿈꾸어왔던 疲弊(피폐)된 농촌개발과 理想鄕(이상향)건설을 향한 역군으로 변신하였다.
그는 서슴없이 낙후된 이 지역의 발전과 농가 소득증대를 위하여 기여하는 한편 국가안보의 정신적 함양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새마을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지금까지 걸어온 험난했던 길을 되돌아보며 그 경험을 토대로 지역주민들에게 "하면 된다"는 의지를 심어주는 동시에, 항상 그가 구상해 오던 선진국형 농업방식 도입의 기초단계로 농가소득증대를 위한 각종 새마을 사업을 권장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사전에 자기농장에서 시험해본 결과 가장 부가가치가 높고 이것이면 되겠다는 사업만을 선택하여 지도에 나섰던 것이다. 처음에야 거들떠보지도 않던 사람들이 그의 열의에 못 이겨 참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농촌 소득증대에 큰 도움을 주게 되었다.
그가 하는 모든 일들의 성과가 오로지 노력과 정성 그리고 사명감과 희생적 정신이 가져다준 결과이자 귀농 성공의 비결이었다고 그를 접하는 모든 사람들이 느끼게 된 것이다. 그처럼 그는 모든 일에 전신 투구하는 그 뜨거운 열의에 주민들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1974년 3월 원호처장으로부터 원호대상자이면서도 지원을 마다하고 불편한 몸으로 황무지를 개간하고 歸農하는데 성공했다하여 표창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정부시책 및 새마을 운동사업의 적극적 참여와 협조자로써 지역사회 발전의 성실한 역군으로, 혹은 귀농 지도자로써 특히 상이용사들의 龜鑑(구감)이 되는 모범적 인물이라는 것이 알려져, 1974년 6월 3일, 국가시책에 적극 호응하여 사회복지증진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영예로운 표창을 받았고, 1987년 3월 12일에는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았으며 1990년 11월 11일에는 과학영농을 통하여 국가 산업발전에 기여한 공이 지대하다고 하여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이처럼 3대에 거친 대통령으로부터 거의 같은 명목으로 개인에게 표창과 훈장이 수여되었다고 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예로서 그가 얼마나 이 일에 정력을 쏟아 부었던가를 충분히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하겠다.
74년 3월 MBC TV가 「절망은 없다」라는 타이틀로, 6월에는 KBS TV가 「人間勝利(인간승리)」라는 타이틀로 각각 박병호 그와, 그가 개간한 농장이 소개되었다. 뿐만 아니라 각 라디오, 신문지상에도 그의 성공사례가 보도되었다.
75년에 들어 그가 飼育(사육)하고있던 乳牛(유우)의 窄油量(착유량)도 다른 목장 것에 비하여 월등히 많았고 품질, 성분이 모두 우수하다하여 그해 2월 한국 酪農(낙농)으롤부터 優秀示範酪農家(우수시범낙농가.75-1호)로 지정을 받았으며 급기야는 1976년 경기도 이천군 축산협동조합 理事로 선임되기도 하였다.
그는 또 농업용수로 사용하기 위하여 농장 내 습지에 만들어 놓았던 저수지를 이용하여 養魚와 稚魚 생산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가 농가소득증대를 위해 해볼만 사업이라고 생각하고 정성 들여 해 본 결과 매우 좋은 성과를 거두어 1980년 경기도 지사가 시행하는 淡水魚 淡水人 선정에서 잉어의 稚魚생산 增産王으로 선발된 바도 있다. 이처럼 그는 자기가 하는 일에는 남 다른 정성을 들였고 열의를 보였다.
75년 4월 3일 경기도 지방공무원 교육원에서 성공사례에 대한 강의를 요청받았고 동시에 강사로 위촉되었다. 같은 해 9월 3일 농수산부 공무원교육원에서도 성공사례 강사로 위촉되었다.
물론 利川君 지방자치단체는 물론 새마을 학교를 비롯하여 각 기관에서도 매일같이 그의 강의를 요청해와 온 본업인 농사일보다 강의 혹은 영농 지도에 더 바뿐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때(74년)를 기점으로 하여 歸農 성공 사례에 대한 특강에만 끝이지 않고 민방위 단체로부터의 안보의식의 고취와 반공정신무장의 강화를 위한 강사까지 맞게 되,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업무량이 많아졌다.
그러나 그는 자기 몸이 불편하다고 하여, 또 주어진 일들이 과중하다고 하여,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즉 지역사회 발전을 위하고, 앞으로 한국 농촌의 기둥이 될 젊은 영농2세들에 대한 육성과 정신무장교육은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重且大한 일들이었고, 자기가 해야 할 임무라고 생각했기에 만사를 제치고라도 강사의 일은 기꺼이 응했고, 개간할 때 겪었던 고통과 경험을 바탕으로 또 육사로부터 시작하여 군생활을 통하여 터득한 智慧(지혜)와 勇氣(용기) 그리고 忍耐(인내)등을 토대로 한 교육프로그램을 작성하여 착실하게 진행하였다.
특히 그는 지역사회개발의 중요성과 국토방위와 반공정신무장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그 계획이 실천에 옮겨져 그 결과가 눈에 보일 때 그는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곤 했다.
그가 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염원해 오던 것의 하나가 利川君 향군회관 건립이었는데 향군회관의 필요성은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느끼고 있으면서도 누구하나 선 듯 나서서 건립사업을 추진해 보겠다는 사람이 없어 차일피일 미뤄오는 꼴이 되어 건립의 꿈이 霧散(무산)될 가능성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더 이상 날짜를 미룰 수 없을 것 같은 절박감에 朴炳浩가 직접 나서 그야말로 赤手空拳(적수공권)으로 시작하였다. 그가 시작하여 다음해에 5층 빌딩이 완성 되었을 때의 기쁨은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가 사회봉사사업을 시작하여 처음으로 올린 큰 성과였기에 더욱 의의 깊은 일이였다. 그는 여기서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했다.
그가 상이용사로써 사지가 멀쩡하고 건강한 사람도 해내기 힘든 일들을 마다하지 않고 희생적 정신을 발휘하여 하는 일마다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리고 있는 것에 감명을 받은 문교부장관은 1984년 3월 5일 농업계 고등학교 영농정착지도위원으로 위촉하였으며 경기도지사는 85년 4월 25일부로 경기도 상설 순회 홍보위원으로 위촉하였다.
1980년 그는 그간 심혈을 기울여 가꾼 농원을 "청원관광농원"이라 이름 짓고 사회봉사적 차원에서 초등학교 및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무료로 개방하여 학과실습농장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다양한 농작물의 재배와 많은 품종의 나무를 심고, 놀이터, 운동장 등까지 설비하였다. 그것은 농촌이 점점 도시화되어감에 따라, 어린이 놀이터가 없어지고 초, 중고생들의 야외학습장이 없어져 가는 것이 안타깝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밖에도 그는 계속하여 현재까지 귀농 후계자육성 및 지역사회발전과 농가소득증대를 위한 사업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국가시책에 기여한 공이 다대하였고, 안보적 차원에서는 민방위대 육성발전에 헌신적 노력을 경주하였으며 특히 반공의식 교육에 남다른 열과 성의를 보여, 국방부장관, 내무부장관, 재향군인회장경기도지사로부터 많은 표창 내지 감사장을 받기도 하였다. (별첨 부록 사본참조)

4. 끝으로
 

朴炳浩는 6.25 당시 혁혁한 전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군 복무기간 중 성실성이 인정되어 육군총장을 비롯하여 군사령관, 군단장, 사단장으로부터 많은 표창을 받았으며, 轉役후에는 그의 사회활동에서는 남들이 하려고 생각도 못하던 荒蕪地 개간의 성공과 낙후된 농촌 개발, 농가 소득증대를 위한 각종사업의 지도 계몽등과 새마을 운동사업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국가시책에 남다른 열성을 보였고, 민방위 교육, 반공정신무장의 강화를 위한 교육, 영농 2세의 육성 등 교육, 歸農者로서의 成功事例 특강 등을 통한 농민 계몽활동 등 다각도의 눈부신 활약이 한 지역사회 발전에 빛이 되었고 龜鑑이 되었다.
따라서 그의 업적이 결실을 맺어 감히 남들은 넘겨보지도 못하는 빛나는 대통령 표창과 훈장을 3代 대통령이 수여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내무부장관, 국방장관, 도지사를 비롯한 지방자치단체장, 각 관계 국가기관장, 유사 단체장 등으로부터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표창, 공로표창과 감사장을 받았다.
그야말로 그는「무에서 유를 창조」해낸 인물로써 그가 싸 올린 빛나는 업적들은 우리 동기생의 자랑인 동시에 육사인 전체의 자랑이며 후배들을 위한 길잡이가 되도록 길이 기억해 두고 싶은 인물이다.
그가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군의 교육과 실전경험과 근무 중에 터득한 열렬한 애국정신의 함양, 투철한 책임감, 강인한 불굴의 정신력, 그리고 고귀한 희생정신 등에서 얻어낸 값진 결실이라고 보는 바이다.
설사 하는 행위와 목적은 다르다 하더라도 앞으로 이와 같은 인물들이 더 많이 태어나 이 사회의 어두운 곳의 희망의 등불이 되어 줄 것을 기대하는 바이다.


◆ 주요경력
 
  성명 박병호(朴炳浩)
  생년월일 1929. 9. 11.생
  현주소
경기 이천시 부발읍 아미2리 산20 청담관광농원

  # 경력
  1949.7.15 - 1950.1.14 육군사관학교졸업 소위임관
  1961.3. - 1965.2. 건국대학 경제학과(야간)
  1957.5.31 26사단 76연대 2대대장
  1963.11.6 6관구 군수참모
  1965.10.1 육군중령 전역
  1975.4.3 경기도 지방공무원교육원 강사
  1976.3.20 이천군 축산협동조합 이사
  1978.1.16 이천군 민방위 정신교육 교관
  1979.4.4 경기도 도청 자문위원
  1981.4.10 반공연맹 이천군지부 자문위원
  1982.1.1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이천군 연합분회장
  1982.3.12 향토방위 지원위원회 상임이사

  # 상훈
  1953.1.16 화랑무공훈장(금성)
  1957.10.20 육군참모총장 공로표창
  1962.10.1 근무공로훈장
  1974.6.3 대통령개인표창(박정희 대통령)
  1987.3.12 국민훈장 석류장(전두환 대통령)
  1990.11.11 대통령개인표창(노태우 대통령)